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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서울 서교동 연습실에서 정정윤 핸드스피크 대표를 만났다. 농인 아티스트들을 위해 만든 전 세계 하나뿐인 연습실이다. 김용재 더버터 기자
농인(수어로 대화하는 청각장애인)들은 이름이 두개다. 한글로 된 본명 이외에 ‘얼굴이름’이라는 게 따로 있다. 한글 이름을 수어로 표현하면 시간이 걸리니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특징을 뽑아 ‘왼쪽 보조개 여자’ ‘안경 추켜올리는 남자’ 등으로 서로를 부른다.
정정윤(39) 핸드스피크 대표에게도 농인들이 만들어준 얼굴이름이 있다. 주먹을 쥔 채 새끼손가락을 하나 세우면 여자라는 뜻. 그 상태에서 엄지에 나머지 손가락을 붙인 다음 미소 띤 입술선을 따라 손을 움직인다. ‘웃음이 넘치는 여자’라는 뜻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건물. 천장이 높은 3층 연습실에서 정정윤 대표를 만났다. 웃음소리가 특이했다. 빠르고 경쾌하게, 자주 웃고 크게 웃었다.
핸드스피크는 2018년 설립된 농인 예술기업이다. 수어댄스, 수어뮤지컬과 연극, 수어노래와 랩 공연 등 농인 아티스트들이 직접 작품을 기획하고 무대를 선보인다. 전용 연습실을 가지게 된 건 작년 7월. 정 대표는 이곳을 ‘꿈의 공간’이라고 불렀다.
진동과 울림
Q. 연습실이 굉장히 밝아요.
A. “양쪽 면이 통유리로 돼 있고 긴 벽 전체에 거울이 붙어있어서 더 밝게 느껴지나 봐요. 여기서 서른 명 정도가 함께 연습할 수 있어요.”
Q. 꿈의 공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네요.
A. “공간 자체도 밝고 좋지만, 멤버들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연습실이 있다는 게 저희에겐 의미가 커요. 농인 댄서와 배우들이 예술 활동을 하기에 특화된 공간이고요.”
Q. 어떤 점이 특별한가요.
A. “가장 중요한 건 바닥이에요. 농인 아티스트를 위해 특수하게 고안된 ‘진동바닥’이 깔렸어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농인들은 스피커를 통해 바닥에 전해지는 진동으로 음악을 느껴요. 박자를 셀 때 청인(음성언어로 소통하는 비장애인)들처럼 원, 투, 쓰리, 하고 말로 세지 않고 발로 쿵쿵 울리면서 박자를 맞추죠. 비트와 울림이 최대한 잘 느껴질 수 있는 진동바닥을 시공하려고 거의 6개월간 연구했어요.”
Q. 시중에 그런 게 없었나 봐요.
A. “소음이 안 나도록 시공해달라는 경우는 있어도 진동이 느껴지게 해달라는 경우는 잘 없죠. 소재를 조합하고 두께를 바꿔가면서 만든 게 이 바닥이에요.”
Q. 댄서나 배우들이 좋아하겠어요.
A. “매우 좋아해요. 연습하기 편하다고요(웃음). 공간을 보면 중간에 기둥 같은 게 하나도 없죠. 이것도 중요한 고려사항이에요. 연습할 때 서로 수어로 소통해야 하는데 기둥이 있으면 잘 보이지 않아서 원활하지가 않거든요.”
Q. 이렇게 갖춰진 연습실이 해외에도 있나요.
A. “다녀봤는데 없었어요. 농인 아티스트들을 위해 바닥까지 공사한 공간은 이곳이 유일해요.”
손잡아줄 한 사람
Q. 농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2009년 공연기획사에 근무할 때 춤추는 걸 좋아하는 농인 청소년 셋을 알게 됐어요. 이혜진·김희화·김지연. 그저 취미로 춤을 추는 줄 알았는데 춤이 아이들의 ‘꿈’이더라고요. 댄스 수업받을 때 선생님이 설명하는 내용을 문자로 쳐서 알려주기도 하고 공연할 때 가서 도와주기도 했어요.”
Q. 그 인연이 이어진 건가요.
A.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매니저 역할을 했어요. 한번은 해외에서 열리는 대규모 ‘데프댄스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됐는데 우리 공연을 보고 사람들이 다들 기립박수를 치는 거예요. 그때 깨달은 바가 좀 많았어요.”
Q. 어떤 깨달음이었나요.
A. “항상 고민했거든요. 왜 우리가 설 수 있는 무대가 없을까. 실력을 더 쌓아야 하는 걸까. 그런데 해외 공연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한국에 농인들의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기회나 지원이 너무 없다는 게 문제였죠. 그래서 동생들과 함께 핸드스피크를 설립했어요. 우리끼리 좋아서 해왔던 일을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보자고 뜻을 모았죠.”
Q. 쉬운 길은 아니었을 것 같네요.
A. “자체 ‘수어통역팀’부터 만들었어요. 농인이 왜 예술 활동을 못 할까 생각해보니 기획회의에 참여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회의에서 소통하는 전문가 대부분이 청인이니 알아들을 수가 없죠. 농인 예술가들의 활동 범위를 늘리려면 수어통역사도 더 늘어야 해요.”
Q. 운영이 쉽지 않았을 텐데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A. “사실 2018년에 회사를 설립하고 2020년까지 월급을 한 번도 못 받았어요(웃음). 직원들 월급 주려면 계속 제가 메꿔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둘째 출산을 앞두고 있다 보니 심각하게 고민이 됐어요.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그때 ‘브라이언 펠로우’에 선정이 됐어요.”
브라이언 펠로우는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설립한 공익재단 브라이언임팩트가 운영하는 사업이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혁신가들이 온전히 몰두할 수 있게 매월 300만원의 활동비를 지원한다.
Q. 꽤 도움이 됐겠네요.
A. “혁신가들이 ‘지치지 않게’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라는 설명이 와 닿았어요. 제가 혁신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티스트들과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서 너무 기뻤죠.”
Q. 어떤 약속인가요.
“인생에서 내 손 놓지 않는 사람 하나만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게 제 철학이거든요. 핸드스피크를 시작하면서 함께 해준 동생들에게 절대로 손을 놓지 않는 언니가 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치열하게 버텼던 거고요. 펠로우가 돼서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있었어요.”
인정의 박수를 받기 위해
Q. 소속 아티스트가 몇 명인가요
A. “예비 아티스트까지 포함해 70명 정도예요. 퍼포먼스·연기·영상·디자인·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Q.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요.
A. “해외를 가 봐도 이렇게 하는 곳이 없어요. 올해 미국에도 다녀왔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농인 극단인데도 소속 아티스트가 한 명도 없었어요.”
Q. 해외에서도 신기해하겠어요.
A. “소속 아티스트가 많다는 것도 신기해하지만, 실력을 보고 더 깜짝 놀랍니다. ‘너희는 어떻게 이렇게 실력을 키웠어?’라고 물어보더라고요.”
Q. 실력 차이가 큰가요.
A. “‘간절함’이 다르다고 할까요. 한국은 농인 아티스트를 위한 제도나 지원이 해외보다 한참 부족해요. 연습실 빌릴 돈이 없어서 다리 밑에서 연습한 적도 많아요. 게다가 저희는 케이팝 댄스의 칼박자, 단체 군무, 이런 걸 계속 봐왔잖아요. 그게 기준이 되다 보니 정말 열심히 연습해요. 반면 해외 농인 댄서들은 느낌대로 추더라고요(웃음).”
Q. 유명 댄스 스튜디오인 ‘원밀리언’과 협업한 뮤직비디오를 봤어요. 밀리지 않던데요.
A. “농인 댄서가 춤을 추려면 박자를 하나하나 쪼개 몸에 익혀야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죠. 음악을 익히면서 박자를 찾고 수어도 넣고 서로 맞추기까지 해야 하니까요. 청인 댄서가 3~4일이면 하는 안무를 농인은 석 달씩 걸리기도 해요. 좋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몇 배는 더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죠. 농인 배우들도 마찬가지고요.”
Q. 배우들도 실력이 뛰어나겠지요.
A. “2년 전에 박지영 배우가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어요. 농인 배우 최초였죠. 전화로 소식을 듣고 엉엉 울면서 연습실로 달려가 지영이에게 알려줬어요. 상을 받진 못했지만,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고생과 노력을 보상받은 기분이었어요.”
같은 마음인 사람
핸드스피크는 지난해 브라이언임팩트의 ‘임팩트그라운드’ 사업에 선정돼 3억원의 지원금을 받게 됐다. 사회혁신조직이 규모를 키울 수 있게 사용처에 제한이 없는 지원금을 제공하는 일종의 ‘신뢰 자본’이다.
“저희에게는 연습실이 절실했어요. 브라이언임팩트에 연습실 임대료로 3억원을 쓰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안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무도 흔쾌히 동의해 줬어요.”
Q. 그 전엔 어떻게 연습했나요.
A. “떠돌이 생활이었죠. 연습이 꽤 많았는데 할 때마다 장소를 공지해가며 옮겨 다녔어요. 다 같이 연습할 큰 공간을 구하는 게 어려워 쪼개져서 연습하는 일도 많았어요. 연습실이 대부분 지하라 걱정되는 점들도 있었어요. 건물에 불이 날 수도 있고 밖에 비가 갑자기 많이 올 수도 있는데 지하에서는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소리까지 들을 수 없으니 농인들에게는 더 위험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Q. 그래서 지상 3층으로 올라왔군요. 연습실이 생긴 뒤에는 어떤 게 달라졌나요.
A. “예전에는 뮤직비디오 하나 만드는 데 6개월, 뮤지컬은 1년 걸렸는데 지금은 뮤직비디오는 한 달 반, 뮤지컬은 3개월 만에 완성이 됩니다. 한 장소에서 연습하고 수정하고 회의까지 할 수 있어서 시간이 단축되고 비용도 줄었어요. 공간이 있다는 이유로 핸드스피크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어요. 정부와 기업에서도 협업을 제안하는 일이 많아져 수익도 늘었습니다. 지속가능성이 생겼죠.”
최근에는 기부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카카오같이가치 ‘매달기부’에서 핸드스피크 모금함을 보고 연락했다며 500만원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카카오임팩트에서 연결해준 덕에 매달기부에 정기 모금함을 개설할 수 있었고, 온라인 기부자들도 생겨나고 있어요.”
정정윤 대표는 인터뷰 내내 많이 웃었다. 운 건 딱 한 번. 이 말을 하면서다.
“믿음이란 ‘마음이 같다’는 뜻이 아닐까요.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마음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저는 행운아인 것 같아요.”
김시원 더버터 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0229